변우택 이사장 / 사단법인 주거환경연합
독도는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당연히 우리나라 영토라고 우리는 마땅히 주장하지만 간교한 일본은 그런 우리의 주장을 아랑곳하지 않고 교묘한 국토 침탈행위를 1905년 이래 계속 행하고 있다.

사단법인 주거환경연합 변우택 이사장은 1980년 독도경비대로 근무하며 독도와의 인연을 맺은 뒤 현재까지 다양한 독도의 사진을 비롯해 독도와 관련한 방대한 자료를 모으고 독도 시집을 발간하는 등 말 그대로 ‘독도지킴이’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에 주거환경신문에서는 변우택 이사장이 정리한 독도 관련 자료들을 지면이 허락하는 대로 연재할 예정이다.

지난 호에 이어 독도를 호시탐탐 노리며 야욕을 숨기지 않고 있는 일본의 행동에 대처하여 독도를 지켜온 사람들 중 대표적 인물과 의용수비대, 독도경비대 등을 소개한다.

변우택 이사장은 “독도를 사랑하는 사람들 나아가서 우리나라 모든 국민들이 독도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국심을 가지고 ‘독도사랑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자료를 수집 정리했다”고 밝혔다.

 

∥의용수비대

6.25의 혼란 속에서 일본인들은 1953년 3차례에 걸쳐 독도에 상륙하여 1948년 미군 폭격연습 과정에서 희생된 어부의 위령비를 파괴하고 일본영토표지를 하는 등 불법행위를 자행했다.

 

<독도의용수비대원>

홍순칠, 황영문, 김재두, 조상달, 김현수, 김장호, 양봉준, 김용근, 이상국, 김수봉 허신도, 김영호, 고성달, 김인갑, 구용복, 김병렬, 한상용, 정재덕, 정이관, 안학률 정현권

 

<의용수비대 활동내용>

-1952년 01월 18일 : 정부에서 주권선언을 하다.

-1952년 08월 10일 : 2회에 걸쳐 일본 측에서 불법적인 영토비를 설치하였으나 즉시 제거하다.

-1953년 04월 20일 : 홍순칠 수비대장을 비롯한 6.25참전 경험이 있는 혈기 왕성한 청년 33명이 중심이 되어 순수 민간조직인 의용수비대를 결성하다. 이들은 울릉경찰서로부터 지원받은 박격포, 중기관총, M1소총 등 빈약한 장비를 갖추고 독도를 지키다. 그들은 독도근해에서 조업 중인 울릉도 주민을 보호하고 독도에 무단 상륙한 일본인의 축출 및 일본 영토표지를 철거했으며 일본 순시선과 여러 차례 총격전도 벌이다. 일본전투기의 공격에 대해 큰 통나무에 검은 칠을 한 “위장대포”를 만들어 물리치기도 했다.

-1953년 06월 24일 :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을 귀환 조치하다.

-1953년 07월 12일 : 일본 해상 보안청 순시선에 대해 발포하여 격퇴하고 이때 대한민국 국회는 독도를 보전할 것을 결의하고 경비대를 상주토록 하다.

-1953년 08월 15일 : 동도 암벽에 대한민국 영토비 “韓國嶺”이라 새기고 독도수비의 결의를 새롭게 했으며 등대를 점등하다.

-1954년 08월 05일 :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을 총격전으로 격퇴하다.

-1955년 11월 21일 :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3척과 항공기 1대를 발포하여 격퇴하다.

-1956년 04월 08일 : 경비임무 전환(민간수비→국립경찰)경찰경비대에 경비임무를 인계한 후에도 독도방파제 설치를 정부에 건의하고 독도 지키기와 가꾸기 운동을 꾸준하게 벌였다.

-1996년 04월 12일 : 정부는 독도의용수비대장 故 홍순칠 대장에게는 보국훈장을 나머지 대원에게는 광복장을 수여하여 그들의 독도사랑의 애국심을 기렸다.

 

∥독도주민 1호 최종덕 씨

독도에 수비대원이나 경비대원이 거주해왔지만 일반인이 살지 않던 독도에 최종덕 씨는 최초의 민간인으로 독도주민등록 1호이다. 최종덕 씨의 독도관련 행장은 1965년 3월 울릉도 주민으로 도동 어촌계 1종 공동어장 수산물채취를 위해 독도에 들어가 어로 활동을 하였으며 1968년 5월 거주 시설물 건립을 착수하였다. 1980년,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다시 주장하고 나오자“단 한명이라도 우리 국민이 독도에 살고 있다는 증거를 남기겠다.”며 1981년 10월 14일에 울릉군 남면 도동 산 67번지 서도의 단애발치에 터전을 마련하고 주민등록을 옮겼다. 주민등록을 옮긴 후 최종덕 씨는 5년 동안 독도에 거주하면서 서도 선착장의 어로가옥 재건축을 비롯해 식수가 나오는 물탕골로 가는 경사 70도의 가파른 산길에 시멘트 계단을 설치하는 등 험악한 자연과 싸웠으며 또 수중창고를 마련하였고 전복수정법과 특수어망도 개발하였다고 한다. 최종덕 씨는 필자가 1980년 5,6월 독도경비대로 있을 적에 서도에서 어로생활을 하였고 당시 동서도를 내왕하면서 가끔 만나곤 했다. 당시 그는 어부 1,2명 그리고 제주해녀 2명 등과 함께 기거하면서 해삼, 문어, 전복 등 주요 해산물을 채취하였다. 그는 1987년 9월 23일 사망하였다.

 

∥독도경비대

①법적근거와 변천사

경찰이 독도경비를 담당하는 법적 근거는 대통령 훈령에 의하여 실시하고 있는데 훈령 제28호에는 울릉도 지역 해안경비는 경찰이 담당하도록 되어 있으며,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이기 때문에 경찰이 경비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경찰이 경비임무를 수행하게 된 것은 1956년 4월 8일이다. 독도의용수비대로부터 독도경비임무를 인수받을 당시 울릉경찰서에서 8명의 경찰관이 입도하여 의용수비대원과 합동 근무 후 1956년 12월 30일 독도의용수비대원은 완전 철수하였다. 그 후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역할이 증대되면서, 독도 근해에 일본순시선의 출현이 급격히 증가하여, 1991년 5월 합참의장과 국방정책 비서관이 독도를 방문한 결과 "독도는 군사적 의미보다 국가전략적 가치가 지대한 만큼 독도방위를 견실히 하기 위한 경계태세, 지원체제 등 종합적 검토가 필요하다"며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으며, 종합적인 대책을 강구하라는 대통령의 지시에 의거 경비막사를 증축하고 1993년 12월 25일 레이더를 설치하고 인원을 증원하였다.

1996년 5월 한·일간 영유권 문제가 대두되어 독도 해상경비 독도경비대 보강 대책을 수립하기 위하여 통합방위본부 주관으로 독도경비보강을 위한 군·경 합동점검을 실시하여 경비체제 개선 보완을 위하여 울릉경찰서 소속 독도경비대와 울릉도 경비를 전담하고 있는 318전경대와 통합하여 1996년 6월 27일 창설한 울릉경비대 예하에 독도경비대를 두고 울릉경찰서장 책임 하에 운용하고 있다.

 

②경비대의 임무

독도경비대의 주 임무는 독도경비근무이다. 경비대 또는 수비대라 불리어 왔으며 그 규모는 1956년 독도수비대로부터 임무를 넘겨받은 이후부터 줄곧 1개 분대 병력(필자가 경비대원으로 근무할 1980년 당시에는 민간인 통신기술자 1명과 분대장 경찰 1명, 전경대원 9명)이 경비임무를 담당해오다가 1993년부터 증원하여 소대병력 규모가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독도경비임무 수행 중 순직한 사람은 현재까지 경찰관 5명, 전경 1명이다.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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