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우택 이사장 / 사단법인 주거환경연합

독도는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당연히 우리나라 영토라고 우리는 마땅히 주장하지만 간교한 일본은 그런 우리의 주장을 아랑곳하지 않고 교묘한 국토 침탈행위를 1905년 이래 계속 행하고 있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은 한반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에 격분하여 필자는 이곳저곳에 산재되어있는 자료들을 한 곳에 모아 이 자료를 통해 독도를 사랑하는 사람들 나아가서 우리나라 모든 국민들이 독도의 연혁과 분쟁사를 이해하는데 보탬이 되고 독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자료를 정리하였다.

 

(4)조선시대

1403(3736, 癸未) 조선 태종 3, 『太宗實錄』 권6.

8월 관찰사의 장계를 따라 江陵道 武陵島 거주민을 육지로 나오게 하다.

 

1416(3749, 丙申) 조선 태종 16

독도와 울릉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분명히 인식하여 왜구로부터의 침략에 대한 예방책으로서 울릉도에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비워두는 공도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공도정책에 대해서는 수정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여러 번 제기되었고 울릉도에 읍을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공도정책은 계속되어 거주민들을 쇄환하고 이들에게 '본국을 모반한 죄'를 적용하여 처벌하기까지 하였다. 그 결과 내륙인들의 울릉도 왕래는 끊어지게 되었고 울릉도와 독도는 점차 잊혀져가는 섬이 되었다.

 

1417년(3450, 丁酉) 조선 태종 17

김인우를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임명하고 울릉도로 파견하여 15호 86명이 거주하고 있음을 확인하다. 그 중 3명은 안무사의 설득으로 육지로 이주하다. 고려말의 정권불안정과 부패로 부담되는 가중한 세금과 부역을 피하기 위해 울릉으로 이주하였는데 이것을 막기 위해 공도정책을 시행하다. 우산무릉등처란 섬이 우산도와 무릉도 등 2개가 있다는 표현으로 독도를 우산도로 호칭하였다.

 

1425(3758, 乙巳) 조선 세종 7, 『世宗實錄』 권30.

세종도 공도정책을 계승하여 10월 于山武陵等處按撫使 金麟雨를 다시 파견하여 남녀 20명을 잡아와서 충청도의 깊은 산골에 정착시키고 3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다.

 

1432(3765, 壬子) 조선 세종 14

세종14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 무릉 두 섬이 울진현 正東 바다 한가운데 있다. 두 섬 간의 거리는 멀지 않아서 청명한날에는 바라다 보이며 신라 때는 우산국이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新羅時 稱于山國

 

1438(3771, 戊午) 조선 세종 20

남회와 조민을 무릉도 순찰경차관으로 파견하여 남녀 66명을 수색해서 본토로 송환하고 본국 모배죄를 적용하여 주모자 김안은 교수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노복으로 삼다.

 

1441년(3774, 辛酉) 조선 세종 23

만호와 남호에게 울릉도 수색을 지시하여 70여명을 송환하고 공도정책을 계속 이어갔다. 그러자 울릉도 독도에는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게 되었다.

 

1451(3784, 辛未) 조선 문종 1 『高麗史』 권58 地理3 東界 蔚珍縣條

고려사가 편찬되었는데 『地理志 동계 울진현조』에 “鬱陵島는 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于山∙武陵은 원래 두개의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라고 기록하였다.

 

1454년(3787, 甲戌) 조선 단종 2년, 世宗實錄地理志 卷 153

강원도 울진현조에 울릉도와 독도 두 섬의 개략적인 위치를 "우산∙무릉 두 섬이 정동해 중에 있다". "두 섬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날씨가 청명하면 바라 볼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세종14년(1432년)에 편찬된 [신선입도지리지]를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1469(3802, 己丑) 성종 1

성종실록에 김자주라는 사람은 “25일에 섬 서쪽 7∼8리 남짓한 거리에서 보니 북쪽에 세개의 바위가 나란히 섰고, 다음은 작은 섬이 있고, 또 다음은 암석이 나란히 섰으며, 그 다음은 중도이고, 중도 서쪽에도 작은 섬이 있는데 그 모두가 바닷물과 통한다. 바다와 섬 사이는 인형 같은 것이 별도로 30여개가 서 있는데 의심나고 두려워 섬에 접할 수가 없어 도형을 그려 돌아왔다”고 기록하였다.

 

1472(3805, 壬辰) 조선 성종 3,『成宗實錄』 권15, 17, 19.

2월 병조에서 三峯島를 찾기 위한 節目을 올리다.

4월 三峯島敬差官 朴宗元이 탐사를 나가다.

6월 강원도 관찰사가 치계(馳啓)하기를 5월 28일 울진포를 출발한 박종원 일행이 풍랑을 만나서 6월 6일 간성군으로 돌아왔고 사직(司直) 곽영강(郭永江) 등 나머지 3척은 5월 29일 무릉도(武陵島)에 도착하여 섬을 수색하고 6월 6일 강릉 우계현(羽溪縣)으로 돌아왔다고 하다.

 

1531년(3864, 辛卯) 조선 중종 26, 新增東國輿地勝覽 권 45

울진현조에 우산도와 울릉도 두 섬은 울진현 정동에 있다. 우산도의 세봉우리가 하늘로 곧게 솟았으며 남쪽봉우리가 약간 낮다. 날씨가 맑으면 울릉도에서 세봉우리가 보이고 바람이 잦아지면 이틀에 도착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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